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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지식

길상사에 얽힌 이야기 (feat. 김영한(자야)과 백석의 러브스토리)

이번 긴 추석 연휴를 어떻게 보내야하지,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가족들과 길상사에 다녀오게 되었다.

 

길상사는 내 기억이 맞다면 올해 봄에 처음 다녀왔는데, 너무 인상 깊었다. 마침 엄마는 오늘 처음 방문하시는 거였는데, 엄마도 이 사찰이 꽤나 인상 깊으셨던 모양이다.

 

서울의 부촌(?)을 구경할 수 있는 이 길상사는 특이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길상사를 더욱 특별한 절로 만들어 주는 사연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길상사
길상사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吉祥寺)는 1997년 세워진 불교 사찰이다.

길상사는 과거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大苑閣)을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설립 이력을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김영한(1916~1999)이라는 분이 계셨다. 이분은 15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으나,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남편과 사별하게 되고 시댁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이후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시와 글, 그림, 글씨에도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한국전쟁 후 1950년대에 한식당을 차렸는데, 이 식당이 서울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이 되었다. 아주 대형 요정이었다고 한다.

김영한은 요정을 운영하며 많은 부를 쌓았지만, 아무래도 기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인해 명예롭지는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김영한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게 된다. 이에 큰 감명을 받은 김영한은 법정스님께 대원각 터 7,000여평과 40여채의 건물을 조건 없이 시주할테니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했다. 법정스님은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10년을 간청하니 1995년, 결국 이를 받아들이셨다고 한다.

 

1995년 당시, 대원각은 시가 1000억 원이 넘었다고 한다. 그 당시 1000억 원이었으면 현재 가치로는 대략 1조원이라고 한다 ㅎㄷㄷ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던 것인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그렇게 대원각이 개보수되어 만들어진 절이 지금의 길상사이다.

 

 

 

김영한은 불교에 귀의하여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사망한 후 유골은 길상사에 뿌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길상사에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이 길상사는 시인 백석과 기생 진향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설처럼 스며들어 있다.

 

 

김영한 자야
기생 시절의 김영한(자야)

 

 

 

기생 진향은 바로 김영한이다. 그녀는 기생이었지만 꽤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생활했고,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을 지녔던 엘리트 여성이었다고 한다. 권번에서 ‘진향’이라는 이름으로 유명세를 날리던 기생.

 

그녀가 23살에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우연히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기행이라는 남자를 1936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백기행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인 백석이다.

 

 

 

시인 백석
시인 백석 (청산학원 3학년 시절)

 

 

당대 최고의 모던보이였던 백석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정말 많았다고 한다. 그는 맘에 드는 여인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하는데, 김영한에게 이백의 자야오가에서 따온 이름인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선물해주었다.

 

 

 

백석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둘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백석은 아예 서울에 있는 김영한을 위해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 조선일보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의 동거 생활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석의 집안에서는 기생 신분의 진향을 사랑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 시켰는데, 신혼 첫날 밤부터 도망치기를 여러 번 시도했다고 한다. 헉스,, 

 

결국 드라마같이 집안의 반대로 진향을 못 만나게 된 백석은, 어느 날 진향에게 만주로 함께 도망가자고 했다. 그러나 김영한은 이를 거절했고, 이후에도 몇 번이나 도피를 거절했다고 한다.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가 가족과 등지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슴 아픈,, 러브 스토리,,,ㅠ,,

 

 

 

백석은 할 수 없이 만주에서 시 100편을 써오겠다고 다짐하며 홀로 떠났다. 그는 만주를 유랑한 후 광복 이후 함흥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김영한은 서울로 떠난 후였고, 그 후 전쟁이 터지고 38선이 생겨버려 둘은 영원한 이별을 맞게 되었다.

 

 

 

 

이후 김영한은 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1년 중 딱 하루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7월 1일, 백석의 생일이다. 백석의 시를 읽으며 통곡하다가 혼절하기도 했다고 한다… 너무나 마음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아닌지,,ㅠ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들의 러브스토리를 뒤로하며, 김영한이 죽기 열흘 전 한 기자와 나눴던 대화로 포스팅을 마무리한다. 

 

 

 

 

 

 

"천 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 있어."

기자는 또 한 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 태어나서 문학 할 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거야."

 

(김영한이 죽기 열흘 전 한 기자와 나눈 대화)